청주 지역 3․1운동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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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지역 3․1운동과 기독교
청주 지역에서도 젊은 기독청년들이 민족 운동에 참가했다. 청주 지역의 3․1운동은 처음 3월 9일, 청주공립농림학교 학생 70여 명이 청주읍교회 내에 있던 청남학교 교사 및 학생들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벌이려다가 사전에 눈치 챈 일경의 단속으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3월 23일부터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밤에는 농촌 지역에서 봉화를 이용하는, 이른바 봉화시위를 벌였고, 낮에는 읍내로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를테면, 3월 23일 강내면, 강외면, 옥산면에서 봉화시위가 벌어졌으며, 이러한 움직임이 오창, 부강 등지까지 확산되었다. 또한 봉화시위와 더불어 청주 읍내에서는 적을 때에는 수십 명에서부터 많게는 3,000여 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모여 산발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청주 지역에서는 낮에는 청주 읍내로 모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였고, 밤에는 야음을 틈타 봉화시위를 함으로써, 지속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
특히 3월 30일에 일어난 미원면의 만세운동은 청주군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운동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수란·신경구·이용실·오교선 등의 주도로 일어난 미원면의 만세시위는 장날을 틈타 모여든 1,000여 명 이상의 시위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경과 격렬히 충돌하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북일면 세교(細橋)에서도 의병장 한봉수의 지휘 하에 미원면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의 송공비가 청주중앙공원에 우뚝 서 있다. 현 한민구 국방부장관은 한봉수의 손자로서, 조부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나라 지키기에 앞장서고 있다.
3.1운동 당시 특히 청주읍교회의 청년들은 당시 청년회장인 김태희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거기에 남전도회 여전도회가 적극 후원하였다. 당시 민노아 선교사는 정교분리의 입장에 있었으나, 김태희를 중심으로 한 청년들은 입장이 달랐다. 이들은 후에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정치자금 조달에도 참여했는데, 이 일로 인하여 김태희, 박경학, 이동현, 정규택, 김태근, 김광현 등이 청주 경찰서 유치장에 근 1개월간 수감되어 심한 고문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교회는 별 피해가 없었고, 신도가 더욱 늘어났다. 민노아 선교사가 제 『제17회 경충노회록』 (1919. 12. 23)에 보고한 충청도 시찰위원의 보고에 의하면,
∙감사한 일 : 금년 봄 독립만세 사건으로 각 교회가 뒤숭숭하나 아무 환난 없이 지낸 것과 각 교우의 신앙이 점차 견고하여지는 일이며.
∙교회 형편:신자가 증가되고 있으며, 은연중 핍박은 좀 있으나 과하지 않으며, 개인전도에 힘쓰고, 건축은 청안읍교회와 괴산 칠성암교회당을 건축한 일이며
-충청도 시찰위원 보고서(보고인 민노아)
라고 한 것으로 보아, 3․1운동 때에 교회가 핍박을 받긴 했으나,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 할 때에 기쁨이 충만 하도다.”라는 찬송을 힘차게 부르며 개인전도에 힘쓰는 가운데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 충주 지역 3.1운동과 기독교
청주 지역에서도 젊은 기독청년들이 민족 운동에 참가했다. 청주 지역의 3․1운동은 처음 3월 9일, 청주공립농림학교 학생 70여 명이 청주읍교회 내에 있던 청남학교 교사 및 학생들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벌이려다가 사전에 눈치 챈 일경의 단속으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3월 23일부터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밤에는 농촌 지역에서 봉화를 이용하는, 이른바 봉화시위를 벌였고, 낮에는 읍내로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를테면, 3월 23일 강내면, 강외면, 옥산면에서 봉화시위가 벌어졌으며, 이러한 움직임이 오창, 부강 등지까지 확산되었다. 또한 봉화시위와 더불어 청주 읍내에서는 적을 때에는 수십 명에서부터 많게는 3,000여 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모여 산발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청주 지역에서는 낮에는 청주 읍내로 모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였고, 밤에는 야음을 틈타 봉화시위를 함으로써, 지속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
특히 3월 30일에 일어난 미원면의 만세운동은 청주군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운동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수란·신경구·이용실·오교선 등의 주도로 일어난 미원면의 만세시위는 장날을 틈타 모여든 1,000여 명 이상의 시위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경과 격렬히 충돌하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북일면 세교(細橋)에서도 의병장 한봉수의 지휘 하에 미원면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의 송공비가 청주중앙공원에 우뚝 서 있다. 현 한민구 국방부장관은 한봉수의 손자로서, 조부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나라 지키기에 앞장서고 있다.
3.1운동 당시 특히 청주읍교회의 청년들은 당시 청년회장인 김태희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거기에 남전도회 여전도회가 적극 후원하였다. 당시 민노아 선교사는 정교분리의 입장에 있었으나, 김태희를 중심으로 한 청년들은 입장이 달랐다. 이들은 후에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정치자금 조달에도 참여했는데, 이 일로 인하여 김태희, 박경학, 이동현, 정규택, 김태근, 김광현 등이 청주 경찰서 유치장에 근 1개월간 수감되어 심한 고문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교회는 별 피해가 없었고, 신도가 더욱 늘어났다. 민노아 선교사가 제 『제17회 경충노회록』 (1919. 12. 23)에 보고한 충청도 시찰위원의 보고에 의하면,
∙감사한 일 : 금년 봄 독립만세 사건으로 각 교회가 뒤숭숭하나 아무 환난 없이 지낸 것과 각 교우의 신앙이 점차 견고하여지는 일이며.
∙교회 형편:신자가 증가되고 있으며, 은연중 핍박은 좀 있으나 과하지 않으며, 개인전도에 힘쓰고, 건축은 청안읍교회와 괴산 칠성암교회당을 건축한 일이며
-충청도 시찰위원 보고서(보고인 민노아)
라고 한 것으로 보아, 3․1운동 때에 교회가 핍박을 받긴 했으나,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 할 때에 기쁨이 충만 하도다.”라는 찬송을 힘차게 부르며 개인전도에 힘쓰는 가운데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 충주 지역 3.1운동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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